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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거장’ 주지아로와 고 정주영 회장과의 만남..그가 현대차와 인연을 맺게 된 배경은?

포니 쿠페 콘셉트 복원..내년 상반기 공개 계획

Hyundai
2022-11-25 12:36:41
조르제토 주지아로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 디자이너

[용인=데일리카 하영선 기자] “지난 1973년 말쯤입니다. 그 때 창업주(고(故) 정주영 전 현대자동차 회장)께서 이탈리아 토리노를 직접 방문하셔서 결국 나와의 만남이 이뤄졌습니다.”

85세의 노장, 그야말로 ‘살아있는 전설’로 통하는 이탈리아의 자동차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는 24일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현대차그룹 인재개발원 마북캠퍼스 비전홀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지아로는 “정주영 회장은 현대차가 독자적으로 자동차를 만들어 대량으로 생산하려고 하는데, 당신이 자동차의 디자인과 설계를 맡아달라고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현대차 정주영 명예회장1980년대
현대차, 정주영 명예회장(1980년대)

주지아로는 “정주영 회장의 말을 듣자마자 그냥 당황스러웠을 뿐이었다”고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과연 현대차가 자동차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

그 때만 해도 현대차는 독자모델 없이 포드의 ‘코티나’를 들여와 조립해서 판매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래도 명색이 한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회사였지만, 사실 자동차 기술력은 전혀 없었던 시기다.

포니 쿠페PONY COUPE
포니 쿠페(PONY COUPE)

주지아로는 정주영 회장과의 만남 이후, 곧바로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현대차 울산공장을 찾아 자동차를 정말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울산공장은 지금에야 매끄러운 콘크리트 바닥에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수십대의 로봇이 자동차를 생산하는 최첨단 시설을 갖춘 모습으로 변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그냥 땅바닥에서 근로자들이 수작업으로 차를 만드는 때였다. 그가 봤을 때는 지금의 웬만한 정비소 보다도 낙후된 모습이었을 터.

현대차 아이오닉 5
현대차 아이오닉 5

주지아로는 그러나 “현대차 울산공장에 이어 현대조선소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배를 만드는 모습을 본 후, 현대차도 자동차를 만들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여기서부터 주지아로와 현대차와의 인연이 시작된 셈이다. 한국의 자동차 산업도 사실 이 때부터 성장기를 맞는다.

주지아로는 이탈리아로 돌아오자마자 부랴부랴 디자인팀을 꾸린 뒤 자동차 설계를 끝낸다. 문제는 자동차 디자인은 완성됐지만, 시제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주요 부품들을 현대차가 만들지 못했던 것. 유럽의 선진 자동차 회사와는 달리 자동차를 직접 생산할 수 있는 능력과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던 탓이다.

주지아로와 현대차 50여명의 엔지니어들은 이런 곤혹스런 역경을 하나씩하나씩 극복한 후, 결국 불과 8개월 만에 ‘포니 쿠페 콘셉트’를 내놓게 된다. 지금도 차 한 대를 개발하는데 약 5000억원, 평균 4년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야말로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짧은 시간이다. 그래서 ‘현대 속도전’이라는 말도 나온다.

현대차 콘셉트카 N 비전 74N Vision 74
현대차, 콘셉트카 N 비전 74(N Vision 74)

포니 쿠페 콘셉트는 1974년 토리노모터쇼에서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돼 파장을 일으킨다. 쐐기 모양의 노즈와 원형의 헤드램프, 종이접기를 연상케 하는 기하학적 선, 패스트백 스타일의 모던한 감각을 지닌 아름다운 쿠페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변방에 속했던 현대자동차 브랜드로 소개됐으니, 유럽인들 사이에선 놀랄만한 사건, 충격으로 비견됐다. 당시 전시됐던 차 번호판은 ‘서울1 가 1975’였다. 1975년 부터 대량 생산할 1호차라는 의미가 담겨졌다.

주지아로는 이후 현대차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간다. 포니 뿐 아니라 ‘포니보다 더 낫다’는 의미를 지닌 엑셀, 그리고 엑센트, 스텔라, 쏘나타에 이르기까지 20여년간 현대차와 함께 한다. 스텔라의 디자인은 지금도 프리미엄 급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현대차 콘셉트카 N 비전 74N Vision 74
현대차, 콘셉트카 N 비전 74(N Vision 74)

‘자동차 디자인의 거장’ 주지아로가 48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현대차 울산공장을 다시 방문하고 깜짝 놀랐다는 것. 최첨단 시설을 갖춘 공장으로 변모한데다, 포니의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현대차 최초의 전기 양산차인 ‘아이오닉 5’는 그저 아름다웠다는 게 그의 평가였다. 그로서는 그저 ‘격세지감’인 셈이다.

참고로, 아이오닉 5는 전 세계 32개국 100여명의 자동차 전문기자들로 구성된 월드카어워즈(World Car Awards)에서도 ‘2022 올해의 차’, ‘올해의 전기차’, ‘올해의 디자인’ 등 부문에서 3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아이오닉 5는 루크 동커볼케 현대차그룹 COO와 이상엽 현대디자인센터장(부사장)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작품이다.

포니2 1982년 해치백 구조
포니2 (1982년. 해치백 구조)

포니 쿠페 콘셉트는 지금도 다양한 방식으로 현대차 디자인에 영향을 미친다. 현대차가 선보인 고성능 수소 하이브리드 롤링랩(Rolling Lab) ‘N 비전 74’ 역시 포니 쿠페 콘셉트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됐다.

현대차와 주지아로는 1974년 공개됐지만 양산에는 이르지 못했던 ‘포니 쿠페 콘셉트’를 다시 복원한다는 생각이다. 1980년 전후로 포니 쿠페 콘셉트에 대한 자료가 유실된 때문이다. 기자가 칼럼 등을 통해 지적해 왔듯이 아직도 박물관을 마련하지 못한 현대차그룹이 되새겨야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복원되는 포니 쿠페 콘셉트는 내년 상반기엔 일반인도 볼 수 있을 전망이다.

포니 쿠페 콘셉트 복원 프로젝트는 포니 개발을 통해 자동차를 국가의 중추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고, 자동차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이끌었던 고 정주영 회장의 열정을 되짚어 본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현대차  정주영 회장
현대차, 故 정주영 회장

주지아로는 “포니를 디자인했던 시절, 치열한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 도전장을 낸 한국과 현대차의 디자인을 맡아 뿌듯했다”며 “현대차의 브랜드 유산을 기념하는 포니 쿠페 콘셉트 복원 프로젝트에 힘을 보태게 돼 매우 영광이다”고 기뻐했다. 그는 또 “현대차는 결국 기적을 이뤄냈고, 특히 리더십이 뛰어났던 창업주 정주영 회장은 천재다. 칭찬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조르제토 주지아로는 디자인을 연구하는 한국의 학생들에게는 “디자인은 단순히 디자인 만을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며 “자동차의 경우 디자인 뿐 아니라 스트럭처(구조), 진보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인 만큼 (스스로 관심있는 분야에서는) 해박한 지식을 갖추는 게 선행되어야 한다”고 그만의 디자인 철학을 털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