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카 김경현 기자] 지난 2022년 3월, 르노코리아가 사명을 변경한 뒤 처음으로 선보인 순수 전기차 ‘세닉 E-Tech 일렉트릭’은 여러모로 의미가 큰 모델이다. 우선 가격 정책부터 파격적이다. 국내 판매 사양과 동일한 최상위 트림의 현지 판매 가격은 4만 6990유로(약 7968만) 수준인데, 국내에서는 이보다 2000만원 이상 저렴하게 책정됐다.
관세와 물류비 등 부대비용을 감안하더라도 이례적인 수준이다. 전동화 라인업이 비어 있던 르노코리아가 리브랜딩 이후 첫 전기차 카드로 세닉을 선택하면서, 마진을 줄여서라도 존재감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적 판단을 내린 것으로 풀이된다.
그럼에도 현대차그룹의 주요 전기차와 직접 비교하면 가격 경쟁력이 높다고 보긴 어렵다. 대량 판매를 노린 모델이라기보다는, ‘프랑스 현지 생산 모델’을 그대로 들여온 수입 전기차이자 ‘르노’라는 브랜드의 상징성과 이미지를 위해 준비된 카드에 가깝다. 그만큼 르노코리아 내부에서도 기대와 부담, 그리고 전동화 전략 성공에 대한 염원이 복합적으로 담긴 차라고 할 수 있다.
르노 세닉 E-Tech 일렉트릭에는 LG에너지솔루션이 제작한 NCM 타입 87kWh 배터리가 탑재된다. 여기에 전륜 싱글 모터가 맞물려 최고출력 160kW(약 218마력), 최대토크 300Nm를 발휘한다. 1회 충전 주행거리는 복합 기준 460km, 공인 전비는 4.4km/kWh 수준이다.
르노 세닉 E-Tech 일렉트릭
전반적인 주행 감각은 내연기관차에 가깝다. 전기차를 처음 접하는 이들도 부담 없이 적응할 수 있는 세팅이다. 엑셀러레이터를 일부러 불규칙하게, 일반적인 주행과는 다르게 밟아봐도 토크가 급격히 튀어나오기보다는 완만하게 분출된다. 덕분에 운전자를 제외한 동승자들이 멀미를 느끼는 상황이 잘 나오지 않는다. 다만, 전기차 특유의 ‘목이 확 젖혀지는’ 가속감을 기대했다면 다소 아쉬움으로 남을 수 있ㄷ.
회생제동 강도는 과하지 않아 만족스럽다. 일부 경쟁 모델들이 회생제동을 너무 강하게 세팅해 거북함까지 느껴지는 것과 비교하면 분명한 장점이다. 단계도 세분화돼 있어 운전자가 취향에 맞게 조절할 수 있고, 페달과 회생제동이 이어지는 감각도 자연스럽다. 이런 특성은 실주행 전비 효율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서울 가산디지털단지에서 출발해 전북 군산과 부산을 거쳐 경기도 수원으로 돌아오는 약 900km 코스를 달려봤다. 결과는 계기판 기준 평균 전비 6.2km/kWh. 고속 주행 비중이 높았고, 전비 평가를 위해 급가속·급제동을 일부러 반복한 상황까지 감안하면 꽤 눈에 띄는 수치다.
충전 비용도 계산해봤다. 환경부 공용 급속 충전 요금은 kWh당 347원이다. 6.2km/kWh 전비로 900km를 달리기 위해 사용한 전력량은 약 145kWh 수준이고, 여기에 급속 충전 단가를 곱하면 총 충전비는 약 5만 400원 정도다. 완속 충전이나 아파트·주택에 설치된 비공용 충전기를 활용하면 실제 부담액은 이보다 못해도 절반 수준까지 내려간다.
르노 세닉 E-Tech 일렉트릭
이를 내연기관차 기준 연비로 단순 환산하면 체감이 더 쉽다. 24일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시스템 오피넷 기준, 전국 평균 휘발유 가격은 L당 1743원이다. 휘발유 1L 가격(을 급속 충전 단가(347원)로 나누면, 휘발유 1L 값으로 전기차에 약 5.02kWh를 충전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에 실제 전비 6.2km/kWh를 곱하면 세닉 E-Tech 일렉트릭의 단순 환산 연비는 약 31.1km/L 수준이다.
트립 컴퓨터의 주행가능거리 예측 능력도 인상적이다. 일반적으로 전기차는 고속 주행을 이어가면 표기된 잔여 주행거리가 실제 주행거리보다 더 빠르게 줄어들고, 공조장치를 켜면 그 폭이 한 번 더 커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세닉은 달랐다. 주행가능거리 예측이 실제와 크게 어긋나지 않고, 내리막길에서 회생제동으로 전기가 충전되는 구간에서는 남은 주행거리 수치가 바로바로 늘어나는 모습을 보여줬다. 대부분의 전기차가 회생제동에 따른 주행거리 증가를 매우 보수적으로 반영하는 것과 비교하면, 운전자가 체감하는 ‘신뢰도’ 면에서 이점으로 작용한다.
승차감과 주행 질감은 전형적인 ‘프랑스차 같다’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특유의 쫀쫀한 핸들링 감각이 살아 있으며, 곡선 구간에서도 불필요한 거동을 보이지 않았다. 유럽산 해치백 특유의 묵직하고 단단한 주행 감각을 전기 SUV에 잘 옮겨놨다. 그렇다고 승차감이 지나치게 딱딱한 것도 아니다. 방지턱이나 요철을 지날 때 충격이 날카롭게 꽂히지 않고 한 번 걸러져 들어오는 느낌이라, 장거리 주행에도 피로감이 덜하다.
특히 스티어링을 통해 노면을 읽을 수 있는 감각이 살아 있다는 점은 큰 장점이다. 많은 전기차들이 정숙성과 안락함을 이유로 없애버렸는데, 세닉은 프랑스 브랜드 특유의 유러피언 드라이빙 스타일을 충실하게 재현했다.
르노 세닉 E-Tech 일렉트릭
아쉬운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차체의 피칭의 폭이 다소 큰 편이다. 도심 혹은 요철 구간에서 부드러운 승차감을 확보하기 위한 세팅으로 보인다. 다만, 그 탓에 제동 강도를 깊게 가져가지 않더라도 브레이킹 시 차체 앞부분이 꽤 깊게 숙여진다. 이 현상을 줄이려면 서스펜션을 더 단단하게 조율해야하는데, 그렇게 되면 ‘패밀리 전기 SUV’라는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현실적인 대안으로는 브레이크 초반 답력을 조금 더 완만하게 조정하는 등의 세팅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세닉 E-Tech의 차체 비율은 꽤 공격적이다. 전장 4470mm, 전폭 1865mm, 전고 1590mm에 휠베이스는 2785mm다. 숫자만 보면 전형적인 콤팩트 SUV지만, 실제로 보면 큰 휠과 짧은 오버행 덕분에 고성능 차량을 연상케한다.
전면부는 신형 로장주 엠블럼과 르노의 최신 시그니처 헤드램프 그래픽을 통해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드러낸다. 그릴 주변의 마름모 패턴은 램프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하이테크 이미지를 강조하고, 후면 램프는 서로 마주보는 화살표 형태로 디자인해 시각적으로 차폭을 더 넓게 보이게 했다. 프랑스차 특유의 ‘조형 감각’이 전기 패밀리카 위에서 과하지 않게 표현된 모습이다.
파노라마 선루프는 세닉 E-Tech의 ‘하이라이트 옵션’이라 부를 만하다. 생고뱅(Saint-Gobain)과 공동 개발한 ‘솔라베이(Solarbay)’ 글라스 루프는 유리의 50%를 재활용 소재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전체를 한 번에 투명·불투명으로 전환할 수도 있고, 1·2열을 각각 나눠 조절할 수도 있어 탑승자별로 빛 유입 정도를 세팅할 수 있다.
르노 전기차 세닉(SCENIC)
종합하면 세닉 E-Tech 일렉트릭은 프랑스 현지 생산 수입 전기차라는 상징성에, 유러피언 드라이빙 감각을 충실하게 구현한 몇 안 되는 모델이다. 정확하게 작동하는 트립 컴퓨터와 높은 효율, 솔라베이 파노라마 루프 같은 차별화된 사양까지 갖췄다.
다만 이 세닉을 단순히 ‘가성비’나 제원으로만 평가하면, 이 차의 기획 의도를 절반밖에 읽지 못하는 셈이다. 직접 핸들을 잡고 달려보면 정답이 나온다. 르노그룹이 어떤 주행 감각을 지향하는지, 왜 여전히 프랑스를 대표하는 브랜드 중 하나로 남아 있는지를 세닉 E-Tech 일렉트릭은 몸으로 설명한다. 프랑스식 감성 그대로 맛보고 싶은 소비자라면 한 번쯤 눈여겨볼 만한 선택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