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카 김경현 기자] 2014년 당시 국내 시장은 수입 브랜드의 공세가 거셌다. BMW F바디 5시리즈, 메르세데스-벤츠 W212 E클래스, 아우디 C6 A6, 렉서스 ES 등 오늘날에도 명작으로 회자되는 모델들이 본격적으로 ‘수입차 대중화 시대’를 열어가던 시기였다. 완성도와 브랜드 이미지가 모두 탄탄했고, 선택지는 점점 더 다양해졌다.
이에 맞서는 현대차의 라인업도 만만치 않았다. 역대 그랜저 시리즈 가운데서 최고 판매량을 기록한 5세대 그랜저 HG가 버티고 있었고, 그 위에는 오늘날 G80의 전신인 제네시스 DH가 자리했다.
그랜저의 가격대는 3000만~4000만원대, 제네시스는 4500만~6000만원 선에 포지셔닝됐다. 애매했다. 그랜저에 옵션을 조금만 더 얹으면 DH 엔트리 트림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기서 “조금만 더” 보태면 각종 프로모션이 적용된 수입 중대형 세단들도 선택지에 올랐다.
이에 현대차는 그랜저와 제네시스 사이의 틈을 메우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대형 세단에 준하는 고급스러움과 정숙성을 제공하면서도, 차급과 가격은 준대형에 가깝게 잡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랜저 상위 수요와 수입차로 이탈하는 수요를 동시에 흡수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 해답으로 2014년에 등장한 카드가 바로 아슬란이다.
아슬란
아슬란은 그랜저와의 차별화를 위해 3.0리터 V6 가솔린 엔진을 기본으로 탑재했다. 그랜저가 2.4리터 4기통에서 시작했던 것과 비교하면 급을 한 단계 끌어올린 구성이다. 가격은 3990만~4190만원 선으로 책정됐다. 여기에 선택 옵션을 모두 더하면 5065만원으로, 제네시스 DH 엔트리 트림보다 더 비쌌다. 상품 구성은 화려했다. 헤드업 디스플레이, 9에어백 시스템, 8인치 내비게이션, 전·후방 주차 보조 시스템, 고급 가죽시트, 액튠 프리미엄 사운드 시스템(12스피커), HID 헤드램프 등 당시 기준 상위급 사양을 아낌없이 넣었다.
다만 시장성도 부족했고, 타깃도 모호했다. 여러 이유로 그랜저보다 한 단계 위급을 원하지만 사회적 시선과 부담감 때문에 대형 세단은 망설이고, 수입차는 각종 유지비·관리 이슈로 망설이는 소비자층을 노린 셈이다. 문제는 이 시장 규모가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기에 이들을 실제로 움직이기엔 ‘결정적 한 방’도 부족했다.
디자인과 인테리어 구성 역시 애매했다. 외관만 보면 새로운 모델처럼 보였지만, 실내로 들어가면 그랜저 HG와 상당 부분을 공유했다. 도어 트림, 시트 조절부, 대시보드 양 끝에 배치된 송풍구, 계기판, 시동 버튼 등 눈에 잘 띄는 요소들이 그랜저와 동일했다. 얼핏 보면 “부분 변경된 그랜저”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차 자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디자인 완성도, 옵션 구성, 주행 성능 모두 당시 기준으로 충분히 준수했다. 문제는 그랜저와 제네시스라는 베스트셀러 사이에 서 있으면서도, 둘과 ‘확실히 다른 이유’를 끝내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슬란
브랜드와 이름값도 발목을 잡았다. 그랜저는 이미 ‘성공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이름이었고, 제네시스는 누가 봐도 ‘고급’으로 인정받는 대형 세단이었다. 반면 ‘아슬란’이라는 이름은 소비자에게 낯설었다. “신차가 나왔구나” 정도의 인상에 그쳤다.
결과는 매우 좋지 않았다. 업계에 따르면, 아슬란의 연간 목표 판매량은 1만 2000대 수준이었지만 실제 판매량은 목표에 한참 못 미쳤다. 특히 2016년에는 연간 2000여 대 수준에 그쳤다.
결국 아슬란은 2017년 단종되며, 현대차 역사에서 가장 짧은 생을 살다 간 모델 중 하나로 이름을 남기게 됐다. ‘차가 나빠서가 아니라, 존재 이유를 끝내 증명하지 못해 실패한 차’의 대표적인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