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카 김경현 기자] 영국 스포츠카 브랜드 로터스가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핵심에는 ‘경량화에서 시작되는 즐거움’을 표방하던 본래 정체성을 스스로 희석시킨 전략과, 충성 고객 및 중고차 시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상품·네이밍 운영 방식이 겹쳐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로터스는 엘리스·엑시지 등을 앞세워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해온 브랜드다. 공차중량 900kg 안팎의 콤팩트한 차체와 수작업 중심 생산은 효율성과 대중성을 과감히 포기하는 대신, 운전의 재미를 위해 극대화했다.
그러나 이런 철학은 사업성 측면에서 분명한 한계를 드러냈다. 차체가 작고 실내·적재 공간이 협소해 일상용으로 쓰기 어렵고, 승차감과 편의사양도 대중 브랜드 대비 부족했다. 자연히 수요는 서킷 주행과 고성능 운전에 집중된 마니아 계층에 머물렀고, 수작업 위주의 생산 구조 역시 원가 절감과 생산량 확대의 발목을 잡았다. ‘매니아가 극찬하는 브랜드’라는 타이틀이 곧 ‘성장성이 제한된 브랜드’라는 꼬리표로 돌아온 셈이다.
이 한계를 의식한 로터스는 에보라와 에미라를 내놓으며 방향 전환을 시도했다. 두 모델은 기존 아이코닉한 경량 스포츠카 이미지에서 벗어나 차체를 키우고, 실내 공간과 편의사양을 보강하며 ‘데일리 스포츠카’에 가까운 성격으로 재설계됐다. 외관 디자인도 누구나 한눈에 스포츠카로 인식할 수 있는 정제된 비례와 보다 대중적인 실루엣을 택했다. 본격적인 “브랜드 확장”의 출발점이었다.
이어 로터스는 전동화 흐름에 맞춰 전기 세단 에메야와 전기 SUV 엘레트레를 선보였다. 두 차종 모두 동력 성능, 실내 구성, 인포테인먼트 등에서 동급 프리미엄 전기차와 견줄 만한 상품성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로터스 엘레트라
문제는 로터스라는 이름이 자동차 마니아층 외 일반 소비자에게는 여전히 생소한 브랜드라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가 세단과 SUV 전기차를 전면에 내세운 전략은, 브랜드 인지도와 가격 포지셔닝 간 괴리를 키운 요인으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로터스 특유의 극단적인 경량 감각이 유지됐다고 보기도 어렵다. 엘리스·엑시지 시절의 공차중량과 체급을 감안하면, 대형 전기 세단과 SUV에서 같은 수준의 가벼움과 날카로운 응답성을 구현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쉽지 않다. 이 때문에 기존 마니아층이 ‘로터스만의 드라이빙 경험’으로 기억해온 메시지는 희미해졌고, 일반 소비자를 설득할 수 있는 새로운 브랜드 가치도 충분히 부각되지 못했다. 전통 마니아와 신규 고객 어느 쪽에도 명확히 꽂히지 못한 셈이다.
코오롱모빌리티가 설립한 로터스의 한국법인 로터스카스의 실적도 이 같은 흐름을 뒷받침한다. 로터스카스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24년 매출은 220억, 영업 손실 63억, 당기 순손실 51억을 기록했다. 자본 총계는 80억원 수준, 총부채는 263억으로 부채가 자본의 3배 이상인 구조다. 숫자만 놓고 봐도 “이미 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다.
상품 전략 측면에서도 뼈아픈 대목이 있다. 2026년형 라인업 개편 과정에서 기존 고객층과 중고차 시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결정이 논란이 됐다. 로터스는 2026년형 일부 모델의 가격을 인하하고 옵션 구성을 조정하는 연식 변경을 단행했다. 국내 기준 주요 트림 가격은 600이 1억 4490만원, 600 GT SE가 1억 5390만원, 600 Sport SE가 1억 7390만원, 900 Sport가 2억 190만원, 900 Sport Carbon이 2억 2290만원 수준이다. 기존 2024년형 베이스(1억 4900만원), S(1억 7900만원), R(2억 900만원) 구성을 고려하면 가격을 조정하고 사양을 손본, 비교적 일반적인 연식 변경 전략으로 볼 수 있다.
논란의 핵심은 가격 조정 자체보다, 출시 2년 남짓 된 모델의 트림 네이밍 체계를 통째로 갈아엎은 점에 있다. 베이스·S·R으로 익숙해져 있던 체계를 완전히 재편하면서, 기존 오너들의 차량이 시장에서 어떤 포지션과 가치를 갖는지에 대한 기준이 한순간에 모호해졌다. 특히 브랜드 인지도와 판매량이 제한적인 프리미엄 스포츠카의 경우, 이런 네이밍 리셋은 중고차 시장에서 “이전 세대 취급”을 받기 쉬운 구조다.
로터스 엑시지 컵 430 파이널 에디션
럭셔리·니치 브랜드에서 모델명과 트림 체계는 단순한 구분을 넘어 중고차 잔존 가치와 브랜드 상징성을 함께 지탱하는 장치다. 짧은 시간 안에 이름과 체계를 대대적으로 변경하면, 시장은 이를 감가 요인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인지도와 거래 물량이 적은 브랜드일수록 매입·판매 과정에서 더욱 보수적인 시세 형성이 이뤄지기 마련이다. 이 경우 기존 오너 입장에서는 “초기 구매자가 손해를 보는 구조”라는 인식이 굳어지고, 향후 신차를 선뜻 먼저 계약하려는 수요는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업계 관계자는 로터스의 상황에 대해 “전기차·SUV를 내놓은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기존 마니아층을 설득할 수 있는 스토리와 중고차 가치 관리 전략이 부족했던 점이 더 크다”며 “니치 스포츠카 브랜드일수록 라인업 확대보다 정체성과 충성 고객 신뢰를 지키는 게 우선인데, 잦은 상품 전략 변경이 오히려 핵심 고객을 멀어지게 만든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결국 로터스의 최근 부진은 단순히 전동화 전환이나 SUV 투입 같은 표면적인 변화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극단적인 경량 스포츠카에서 출발한 고유의 주행 감각은 충분히 계승되지 못했고, 브랜드 인지도와 가격 사이의 간극은 줄어들지 않았다. 여기에 짧은 주기로 트림 구성과 네이밍 전략을 뒤바꾸는 과정에서 기존 고객층의 신뢰까지 약화시키면서, 판매 부진이라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전동화와 고급화를 동시에 시도한 로터스 사례는 성능과 기술력에 더해 브랜드 정체성과 고객 심리, 중고차 가치 관리까지 아우르는 장기적인 전략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운전의 끝’을 자부하던 브랜드가 스스로 만든 전략의 빈틈에 발목을 잡힌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