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카 하영선 기자] 소프트웨어(SW) 업계에서 '릴리즈(Release)'는 몇 주, 길어야 몇 달 단위로 일어난다. 버그가 발견되면 밤을 새워 코드를 수정하고 무선 업데이트(OTA) 패치를 배포하면 그만이다. 스마트폰 앱이나 서비스 소프트웨어가 시장에서 빠르게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비결도 이처럼 극단적으로 짧은 개발 주기 덕분이다.
그러나 이 문법을 그대로 들고 자동차 공급망(B2B)에 뛰어든 소프트웨어 기업들은 곧바로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힌다. 자동차 산업이 요구하는 '시간의 궤적'이 IT 업계와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모빌리티 시장, 특히 인공지능(AI) 기반 차량용 소프트웨어 분야가 대표적인 '장기 호흡 산업(Long-cycle Industry)'으로 분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트라드비젼 에스브이넷 (SVNet)
22일 업계에 따르면 자동차 산업에서 새로운 기술이 실제 도로 위를 달리기까지는 최소 3년에서 5년의 세월이 소요된다. 완성차(OEM) 업체가 새로운 차량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발행하는 견적요청서(RFQ)를 시작으로, 수많은 기술 조율을 거쳐 공식 공급사로 낙점받는 '노미네이션(Nomination)' 단계에 도달하는 데만 수개월이 걸린다.
진짜 싸움은 노미네이션 이후부터다. 공급사로 선정되면 완성차가 요구하는 하드웨어 플랫폼에 소프트웨어를 최적화하는 선행 개발 과정이 시작된다. 이 단계에서 발생하는 선행 개발비(NRE) 매출은 소프트웨어 기업의 초기 R&D 비용을 일부 보전해 주지만, 이것만으로는 본격적인 흑자 궤도에 오르기 어렵다.
이후 설계 검증(DV)과 생산 검증(PV)이라는 가혹한 신뢰성 테스트 단계를 거쳐 비로소 첫 양산 차량이 공장 라인을 빠져나오는 'SOP(Start of Production, 양산 개시)'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차량 한 대당 라이선스 로열티를 받는 반복 매출(Royalty) 구조가 형성된다.
스트라드비전, AR HUD 개념도
‘노미네이션(공급사 선정)에서 SOP(양산 시작)까지의 3~4년’은 기술 스타트업들에 피를 말리는 ‘데스밸리(Death Valley)’다. 매출다운 매출 없이 오직 기술 검증과 엄격한 품질 규격 충족을 위해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술의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이 기나긴 침묵의 시간을 버티지 못한 수많은 글로벌 AI 스타트업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역설적으로 이 가혹한 장벽을 뚫고 양산 트랙 레코드를 확보한 기업은 자동차 공급망 내에서 독점적 해자(Moat)를 누린다. 자동차는 한 번 개발된 플랫폼이 연식 변경과 페이스리프트를 거치며 최소 5~7년 이상 유지된다. 완성차 업체 입장에선 검증을 마친 소프트웨어 아키텍처를 변경할 이유가 없다. 교체 리스크와 재검증 비용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SOP라는 첫 관문을 넘은 기업은 해당 라인업이 단종될 때까지 장기간 고마진 로열티 매출을 확보한다. 나아가 동일 플랫폼을 공유하는 타 차종으로의 수평 전개 기회까지 선점한다. 결국 시장의 진정한 경쟁력은 ‘참신한 알고리즘’이 아닌, ‘완성차의 타임라인을 버텨내고 실제 도로 위에서 품질을 증명했는가’라는 실전 경험으로 수렴된다.
AMD, 스트라드비젼 (차세대 자율주행 기술 고도화)
국내 차량용 비전 AI 기업인 스트라드비젼(STRADVISION)의 성장은 이 같은 산업 생리를 꿰뚫고 인내한 결과물이라는 말이 나온다. 인텔 출신 엔지니어들이 주축인 이들은 초기 IT 기기용 AI 개발에서 자율주행 시장으로 과감히 피벗했다. 이후 조직 전체를 자동차 표준 규격에 맞게 개편하고 뼈를 깎는 검증을 거쳐 2019년 첫 양산을 시작하며 기나긴 터널을 통과했다.
이 같은 레퍼런스는 ‘스노볼 효과(Snowball Effect)’를 일으켰다. 글로벌 완성차 및 티어1 부품사들의 문턱을 넘는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졌고, 현재 누적 500만 대 이상의 글로벌 차량에 비전 인식 소프트웨어 ‘SVNet’을 탑재하는 성과로 이어진 점은 돋보인다.
모빌리티 업계 관계자는 “자율주행 시장은 단기 시연이 아닌 수년에 걸친 공급망 규격을 버텨낸 대가로 열매를 맺는 곳”이라며 “이미 첫 양산 관문을 넘고 파트너십을 다변화 중인 소수의 기업이 향후 SDV 대중화 시대의 가장 강력한 수혜자가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