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카 하영선 기자] 지금으로부터 214년 전, 장 피에르 푸조(Jean-Pierre Peugeot)는 1810년에 프랑스 벨포르(Belfort)에서 푸조 철강 업체인 ‘푸조 형제 회사(Peugeot-Frère et Compagnie)’를 세운다. 푸조 형제 회사라는 이름은 가문의 이름에서 유래된 ‘푸조(PEUGEOT)’를 활용해 지어졌다.
두 아들은 장 피에르 푸조 소유의 낡은 정곡 공장을 주조 공장으로 개조하고 본격적인 철제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이후 그의 자손들은 이를 토대로 커피 그라인더, 자전거, 스쿠터, 모터사이클 그리고 자동차로 사업 영역을 확장시켜 오늘날 스타일과 혁신으로 가득한 자동차 브랜드, 푸조(PEUGEOT)로 그 명성을 잇게 된다.
당시 푸조 형제 회사의 주요 생산 물품은 철제 생활용품. 1814년 푸조 형제 회사는 재료를 가열하지 않고 상온에서 두 롤러 사이를 오가며 성형하는 가공법인 ‘냉간 압연 시스템’을 마련한다. 이를 통해 푸조 형제 회사의 제품들은 기존 제품에 비해 더욱 높은 인장 강도로 우수한 품질을 갖출 수 있었다는 전언이다. 이를 바탕으로 톱, 시계 부품과 시계 기구 등 각종 생활용품을 생산하고 뛰어난 품질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생활용품 제조 브랜드로서 많은 인기를 누린다.
이후 푸조 형제 회사에서는 재봉틀과 공구 박스, 우산 프레임 등 다양한 생활용품을 제작,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는 그라인딩 기술 특허를 적용한 후추 그라인더를 생산한다. 후추 그라인더 외에도 다양한 주방 용품도 만든다. 세계 최초로 커피 그라인더도 제작한다. 후추 그라인더와 마찬가지로 커피 그라인더 역시 그라인딩 기술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푸조의 인체공학적인 아이-콕핏 인테리어 시스템, SCR 시스템, 세계 랠리 챔피언십(WRC)∙다카르 랠리(The Dakar Rally)에서 수 년 연속 우승을 거둔 뛰어난 주행 성능, 오랜 역사에 걸쳐 유럽 등지에서 인정받은 기술력 등은 이 같은 브랜드 철학을 입증한다. 대중적이면서도 세련된 스타일과 탄탄한 기술로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프랑스 자동차의 대중화를 이끈 푸조는 현재까지도 프랑스 최고의 메이커로 인정받고 있다.
■ 푸조 자전거의 시작
아르망 푸조는 1882년 푸조 형제 회사의 첫 패니 파딩 타입(Penny Farthing)의 대형 자전거인 ‘그랑 비(Le Grand Bi)’를 선보인다. 이후 푸조 형제 회사는 꾸준히 자전거 사업을 확장하는데, 실제로 1차 세계 대전을 위해 6만대가 넘는 자전거를 생산해 공급한다.
이후 1926년 푸조는 자전거 사업을 별도로 분리해 관리하기 시작한다. 푸조 사이클은 꾸준한 성장세를 바탕으로 1930년부터는 보리우(Beaulieu) 공장에서 연간 16만대 이상의 생산량을 확보하며 주요 자전거 메이커로서 성장한다.
■ 푸조 자동차의 시작
푸조 자동차의 역사는 창립자인 아르망 푸조가 유학 중에 자전거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면서 시작된다. 자전거에 대한 관심은 자동차로 이어져 1889년에는 삼륜 자동차인 ‘세르폴레 푸조(Serpollet-Peugeot)’를 제작해 ‘파리 세계 박람회’에 전시하게 된다. 그러니까 세르폴레 푸조는 푸조가 만든 첫 번째 자동차로 불려진다.
하지만 예열 시간과 큰 부피를 가진 증기 기관에는 경쟁력이 없다는 것을 느낀 아르망 푸조는 독일에서 엔진 개발에 집중하며 모터 구동식 마차(Motorised Carriage)를 개발한 고틀립 다임러(Gottlieb Daimler)와 프랑스의 유명 엔지니어이자 르네 파나르와 함께 파나르 르바소를 운영하던 에밀 르바소(Émile Levassor)를 만나 내연기관 자동차 개발을 위한 협력을 약속한다.
1890년 다임러와 파라르 르바소와 함께 개발한 ‘타입 2’가 드디어 공개된다. 타입 2는 증기기관 대신 휘발유 엔진을 장착하고 3륜 대신 4개 휠이 탑재된다. 타입 2는 2.5m 길이에 250kg 남짓한 무게로 앞뒤 좌석이 마주 보는 4인승 차량이다. 최고출력 2.3마력의 엔진을 얹고, 최고속도는 시속 16km를 기록한다. 푸조 자동차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1890년 타입 2의 공개를 시작으로 푸조는 본격적인 내연기관 자동차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이듬해 1891년 다임러 엔진을 장착한 사륜차 ‘타입 3’를 개발한다. 아직 자동차에 대해 시장의 인지도가 높지 않았던 만큼, 푸조는 이를 알리기 위해 고민하고 결국 같은 해 개최된 ‘파리-브레스트 사이클 대회(Paris–Breast)’에 타입 3를 출전시켜 성공적으로 주행을 마친다. 관람객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기에도 충분한 사건이다.
세계 최초의 레이스로 기록된 프랑스자동차클럽(ACF)의 출범의 밑거름이 된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 주관 ‘1894 파리-루앙 트라이얼 레이스’ 역시 푸조에게는 좋은 기회가 된다. 아르망 푸조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3.7마력을 웃도는 ‘타입 7’이 대회에 출전한다. 결국, 타입 7과 드라이버 알베르트 르메트르는 가장 먼저 체커를 받으며 푸조, 다임러 그리고 파나르 르바소에게 영광을 안긴다.
■ 19세기 독자 브랜드로서의 푸조
아르망 푸조는 다임러(Daimler)와 협력 관계 속에서 꾸준히 기술 개발을 이어왔으나, 다임러에 지불하는 로열티가 만만치 않았던 만큼, 1896년 들어 다임러와의 관계를 처분하고 자체 개발 엔진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아르망 푸조는 자동차 산업의 발전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고 자동차 브랜드를 공식 출범시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다임러와 결별한 해인 1896년, 아르망 푸조는 푸조 형제 회사에서 독립해 푸조 자동차(Societe Anonyme des Automobiles Peugeot)를 설립한다. 프랑스, 스위스, 독일 국경 지역인 소쇼(Sochaux)에서 본격적으로 푸조 자동차의 역사를 열게 됐다는 의미다. 소쇼 지역에는 지금도 푸조 박물관을 비롯, 푸조의 생산공장이 그대로 남아있다.
물론 다임러와 푸조가 결별한 배경에는 푸조가 독자 개발에 성공한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타입 15’의 탄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르망 푸조는 타입 15을 앞세워 독자 브랜드로 나서기 위해 오딘코트에 자동차 생산 공장을 새롭게 설립하며 본격적인 자동차 브랜드로서 그 정체성을 쌓는다.
푸조는 다행히 독자 브랜드로도 푸조의 경쟁력을 인정받아 1896년부터 1899년까지 꾸준한 판매 성장이 이어진다. 게다가 1899년에는 니스-카스텔란-니스 랠리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기술력까지 인정받으며 시장에서 호평을 받는다. 분위기를 탄 듯 푸조는 대형 모델 일색이던 라인업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는 계기를 마련한다.
1901년 들어 에토레 부가티(Ettore Bugatti)가 디자인한 소형 모델 ‘타입 BP1’, 속칭 ‘베베(Bebe)’를 ‘파리 살롱’에서 공개하며 크나큰 인기를 얻는다. 여기에 엔진 개발자인 토니 후버(Tony Huber)를 영입하는데, 그는 푸조 브랜드 사상 최초의 6기통 엔진을 개발한다. 푸조는 베베와 6기통 엔진을 앞세워 20세기 초반의 성장세를 이어갔고, 모터스포츠 무대에서도 꾸준한 활약을 펼친다.
푸조 자동차는 1910년 다시 푸조 형제 회사와 합쳐진다. 일종의 기업 개편을 겪으며 로베르 푸조(Robert Peugeot)가 대표로 나선다. 푸조는 이 같은 결집을 통해 프랑스를 대표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한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연간 자동차 생산량 1만대, 자전거는 8만대에 이르는 기염을 토한다.
모터스포츠에서도 푸조는 꾸준한 활동을 펼쳐온다. 푸조는 모터스포츠를 통해 볼 베어링을 시작으로 크랭크 축과 캠 샤프트, 드라이 섬프 등을 대대적으로 개선하고 신기술을 개발하는 경험을 얻는다. 1915년 열린 ‘프랑스 그랑프리‘와 ‘밴더빌트 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등 푸조의 모터스포츠 패권의 역사를 이어간다.
하지만 전쟁은 생산 기업의 형태와 그 운영 방식을 뒤흔들게 되는데, 푸조 역시 이런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푸조는 전쟁 기간 동안 탱크를 비롯한 기갑 전력의 생산을 담당했고, 이를 통해 자본의 확보는 물론 대량 생산의 경험을 쌓게 된다. 이를 통해 푸조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생산 능력을 대폭 확장시킬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1926년에 접어들자 푸조는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다. 1920년대 초반에 데뷔한 ‘타입 153’과 3세대 베베인 ‘콰드레빌레르(La Quadrilette)’의 성공을 발판으로 푸조 자동차 사업부의 주도적인 경영과 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푸조 자동차와 모터사이클 사업을 분리 운영하기로 결정한다.
■ 경제 공황, 그리고 푸조 201
경제 공황은 전 세계를 얼어 붙게 만들었고, 모든 자동차 브랜드들은 힘겨운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푸조는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시장에서 가장 저렴하고, 푸조 브랜드의 새로운 네이밍을 상징하며, 경제 공황의 위기 속에서도 브랜드의 존속을 가능하게 만든 ‘푸조 201’을 공개한다.
푸조 201은 매년 판매량이 줄어드는 푸조가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에 ‘세그먼트’+0+‘세대’로 구성되는 푸조의 네이밍 방식이 적용된 건 이 때 부터다. 푸조 브랜드로서는 그 의미가 남다른 배경이다.
201의 성공으로 푸조는 위기 속에서도 새로운 모델을 투입하고 새로운 도전을 이어나갈 수 있게된다. 이후 1930년대에는 ‘202’와 함께 ‘302’가 등장하며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대형 모델인 ‘601 C 이클립스’도 데뷔한다.
1934년에는 브랜드 최초의 하드톱 방식 컨버터블 모델인 ‘402 BL 이클립스 데캡포터블(Éclipse Décapotable)’이 시장에서 데뷔한다. 푸조 브랜드의 역사적인 모델인 402 BL 이클립스 데캡포터블은 나치의 점령을 당한 이후인 1941년까지 꾸준히 판매되며 소비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얻는다.
■ 제2차 세계대전, 푸조의 재기
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푸조는 위기를 맞거나 중요한 시기에 ‘사자’ 모양의 엠블럼처럼 용맹하게 나서 구심점 역할을 하며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브랜드로 자리 잡는 계기를 맞는다.
푸조에게도 제2차 세계대전은 큰 시련이 닥친 시기였다. 1940년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군은 전쟁 물자가 항상 부족했고, 당시 프랑스 자동차 산업의 주축이었던 푸조와 르노의 공장을 군수 물자 생산 기지로 삼고 싶어 했다. 이 과정에서 푸조 가문의 장 피에르 푸조 3세는 이에 거세게 저항하며 공장을 폭파하고,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자금을 조달하며 저항 활동을 시작한다.
히틀러는 장 피에르 푸조 3세의 체포령을 내렸고, 체포된 푸조는 총살형을 선고받는다. 이때 당시 나치의 기술책임자였던,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 박사는 푸조의 뛰어난 기술력과 프랑스 국민감정을 고려해 히틀러를 설득했고, 결국 장 피에르 푸조는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종전 후 재건한 푸조는 202, ‘403’ 등의 모델을 내놓으며 재기에 성공했다.
재기에 성공한 푸조는 1950년대부터 미국, 호주 등 해외 시장의 문을 두드린다. 1960년 피닌파리나가 디자인한 ‘404’가 미국 진출의 주요 모델로 자리 잡는다. 이후 404는 아프리카의 ‘사파리 랠리’에 출전(1963~1968년)해 우수한 완성도와 강력한 내구성을 자랑한다. 푸조는 이후 혁신적인 디자인의 ‘504’를 공개하며 아프리카, 남미 시장에서도 인기를 얻는다.
■ PSA의 탄생
푸조는 1970년대 중반부터 시트로엥의 지분을 흡수하며 기업 인수를 추진한다. 1919년 설립된 시트로엥은 당시 반켈 엔진 라이선스 비용 지불 및 반켈 엔진 상용화 등으로 인해 재정 상황에 문제가 있었던 상황이었다.
푸조는 약 3년에 걸쳐 시트로엥 인수를 진행했고, 인수 후에는 크라이슬러의 유럽 부분까지 인수한다. 이로써 PSA 푸조 시트로엥(PSA Peugeot Citroën)이 출범하며, 프랑스 경제의 중요한 축이 된다. 또 ‘탈보(Talbot)’ 브랜드를 부활시키는 광폭 행보에도 나선다. 여기에 이탈리아의 터줏대감 피아트 그룹과의 합작회사인 ‘세벨(Sevel)’을 설립하며 브랜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한다.
1970년대 말 ‘푸조의 빅딜’을 통해 푸조와 PSA 그룹은 단번에 유럽을 호령하는 거대 브랜드, 거대 그룹으로 탈바꿈하면서 푸조의 영향력도 거대해진다. 하지만 급하게 먹은 만큼 체증이 불었다. 1970~1980년대를 휩쓴 오일 쇼크는 시장 경제를 경직시켰고, 푸조 역시 인수 및 공동 설립을 위해 진행된 지출의 여파까지 겹치며 위기에 내몰린다.
하지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카드가 푸조의 손에 쥐어졌다. 푸조는 위기를 ‘205’라는 모델로 돌파했고, 나아가 ‘309’(탈보 호라이즌의 리뱃징 모델)와 ‘405’ 등을 연이어 연착륙시키며, 브랜드의 생명력을 유지한다. 게다가 ‘205 카브리올레’를 통해 ‘포드 주의’를 탈피하는 ‘모델의 다양화’의 시작을 알린다.
1985년에는 중국 시장에도 도전장을 던진다. 둥펑 자동차와 함께 ‘둥펑푸조’를 설립하고 404과 405 등을 주력으로 생산한다. 상용차 중심의 둥펑 자동차는 푸조와의 합작으로 승용 시장에서의 입지를 넓히게 됐다. 둥펑 푸조는 이후 ‘둥펑 PSA’로 이름을 바꿔 시트로엥의 모델까지 함께 생산하게 된다.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푸조는 1990년대 들어 소형 모델인 ‘106'부터 ‘205’와 ‘306’, 그리고 중형 모델인 ‘405’, ‘406’을 중심으로 브랜드를 운영한다. 또 ‘605’를 통해 대형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한다.
■ 모터스포츠 도전장 내민 푸조, 아우디 제치다!
1980년대 WRC를 호령했던 푸조는 1990년대에 세계 스포츠카 챔피언십과 F1 등에 집중한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푸조는 투어링카로 다시 눈을 돌린다. 푸조 406을 시작으로 푸조 ‘306 GTi’는 유럽은 물론 세계 모터스포츠 무대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차량이 됐고, 푸조가 차지하는 트로피의 수도 점점 늘어난다.
브라질을 비롯해 남미 시장에서 유행하던 스톡카 스프린트 레이스에도 뛰어들어 꾸준한 활약으로 남미 시장에서 인지도를 높이기도 한다. WRC에서도 철수하기로 결정한 2005년까지 푸조는 ‘206’과 ‘307’ 등을 대회에 투입하며 꾸준히 타이틀 경쟁을 펼쳤고 스바루(Subaru), 미쓰비시(Mitsubishi)와 치열한 경합을 펼친다.
푸조가 꾸준히 공을 들이던 내구 레이스에서도 빛을 발하게 된다. 20세기 말 타 브랜드에게, 그리고 21세기에는 아우디(Audi)에게 번번이 막혔지만, 꾸준히 경쟁력을 과시했던 푸조는 드디어 2009년 들어 아우디를 꺾고 르망 24시 내구 레이스에서 ‘908 HDi FAP’로 원 투 피니시를 기록하는 등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영광을 누린다. 르망에서 아우디를 누르는 쾌거를 이뤘지만, 푸조는 경영 문제로 인해 2012년 철수를 결정하며 아쉬움을 자아낸다.
푸조는 시트로엥 소속으로 WRC의 황제 자리에 오른 세바스티앙 로브와 함께 ‘2013 파이크스 피크 힐 클라임’에서 세계 기록을 경신한다. 푸조는 2015년에는 ‘다카르 랠리’에 25년 만의 복귀를 선언한다. 복귀 첫 해에는 레드불과 손잡은 미니(MINI)가 우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지만, 이듬해 스테판 피터한셀과 시릴 데프레, 세바스티앙 로브를 앞세워 26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2017년에도 우승의 쾌거를 이룬다.
■ 푸조 엠블럼의 의미
푸조 엠블럼의 사자(라이온)는 푸조 공장이 설립된 곳인 벨포르 시의 상징적인 동물이었다. 그 지역 프랑시 백작 (FRANCHE-COMTE)의 방패나 깃발 등에 사용되던 문장이기도 하다. 푸조 자동차의 최초의 이름인 푸조 형제 회사의 첫 엠블럼은 몽벨리아르 지역 보석·조각상으로 유명한 쥬스땅 블라제(Justin Blazer)가 디자인했으며, 1850년부터 사자 문양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최초의 로고는 섬세하게 새겨진 사자의 발아래 화살이 놓인 모습이었고, 당시 생산하던 톱날의 3가지 품질(절삭 속도, 톱니의 경도, 톱날의 유연성)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푸조는 이후 다양한 형태의 엠블럼을 선보이며 1950년에는 ‘싸우는 모습의 사자’ 엠블럼을 처음으로 도입한다. 하지만 1960년대에는 다시 사자의 두상을 엠블럼으로 사용하는 변화를 꾀한다. 그리고 각 브랜드들이 아이덴티티를 강조하던 1980년이 되자, 푸조는 다시 싸우는 모습의 사자로 형상을 되돌린다. 질감 표면의 변화와 색상, 디테일 등을 개선하며, 오늘날 푸조 엠블럼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2021년 새롭게 바뀐 현재 푸조 엠블럼은 2010년 이후 10년 만에 공개되었는데, 직관적이면서도 단순한 형상으로 변화된다. 사자가 앞발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은 웅장한 사자의 얼굴로, 입체적인 형태는 평면적으로 바뀌어 디지털 채널을 비롯한 다양한 환경에서 유연하게 활용 가능하다는 말이 나온다. 새로운 로고, 엠블럼은 브랜드의 영광스러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자동차 브랜드가 이 처럼 로고나 엠블럼을 유난히 중시하는 이유도, 그 브랜드의 철학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영선 기자ysha@dailyca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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