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데이비슨의 120년 역사는 그냥 거져 이뤄진 것이 아니다. 항상 탄탄대로만을 걸어왔던 것도 아니다. 부흥과 좌절, 위기와 혁신이 끊이지 않은 덕분에 현재에 이른다. 120주년을 맞이한 지금은 그들의 역사 속 어떤 굴곡을 넘어가고 있을까. 120주년의 역사를 총 4회로 나누어 들여다보면서 현재를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 1부. 그들의 시작점으로 되돌아가보자.
■ GENESIS
창세기 1장 1절처럼, 할리데이비슨의 태초엔 그들의 창업주 윌리엄 할리와 아서 데이비슨이 그들의 첫번째 모터사이클을 만들어냈다. 1903년의 일이다. 하지만 아무런 계획도 없이 갑자기 그들의 첫 모터사이클 ‘시리얼 넘버 원’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윌리엄 할리와 아서 데이비슨은 자전거에 얹을 엔진의 설계도를 이미 1901년에 완성했고, 첫 모델에 앞선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할리데이비슨의 브랜드 명은 이 창업주들의 성을 딴 것이며, 윌리엄 할리와 아서 데이비슨 말고도 창업주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있다.
아서 데이비슨보다 다섯살이 더 많은 월터 데이비슨이다. 그는 실제 제작 능력을 갖춘 핵심 인물이었으며, 할리데이비슨의 첫번째 생산 모델의 제작 또한 4평 남짓한 그들의 유명한 헛간에서 월터 데이비슨의 손으로 이뤄졌다고 알려졌다.
작은 공간에서 소박하게 시작했지만 이들의 성공은 아주 빠른 속도로 이뤄졌다. 할리데이비슨 모터 컴퍼니란 이름으로 회사를 정식으로 설립했던 1907년에는 이미 작은 헛간에서 약 67평 수준의 첫 공장을 완성한 상태였고, 이 공장에서는 연간 약 50대의 모터사이클을 생산했다. 최초의 창업 멤버는 할리와 데이비슨이지만, 이후 합류한 두 명의 데이비슨 형제를 포함한 총 4명의 창업주는 저마다의 개성과 성향으로 각각의 직책을 수행했다.
윌리엄 할리는 15살 때부터 자전거 공장에서 쌓아왔던 경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경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창업과 거의 동시에 위스콘신 공과 대학에 등록해 1907년에는 이미 졸업을 마쳤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엔지니어로써 회사에서는 수석 엔지니어이자 재무 담당자 역할을 맡았다.
아서 데이비슨은 특히 활달하고 외향적인 성격으로 전체 영업 관리와 사무의 책임자였다. 극히 초기의 할리데이비슨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영업 능력 덕분이다. 그는 회사의 설립 이후, 1908년 연말까지 약 200개 이상의 딜러를 미국 내에서 확보했으며 1912년에는 저 멀리 일본에 자사의 모터사이클을 수출하고 첫 해외 딜러를 확보하기도 했다.
월터 데이비슨은 윌리엄 할리나 아서 데이비슨보다 나이가 약간 더 많았다. 독학으로 전기 기술을 배웠으며 철도 회사 등에서 기계 공작일을 하면서 더 많은 경험을 쌓아왔다. 동생인 아서 데이비슨으로부터 편지를 받고 할리데이비슨에 합류하고, 1907년 공식적인 할리데이비슨의 설립 이후 초대 사장 겸 총괄 매니저로 지명되어 근무했다.
데이비슨 삼형제들 가운데 맏형인 윌리엄 데이비슨은 회사의 부사장으로 제직했다. 그 스스로가 이미 숙련된 기계공이었기 때문에, 제조 과정에서의 공정을 개선하기 위한 장비들을 선택하는 등 일련의 제조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흔히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지만, 할리데이비슨에게 이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서로의 전문 분야를 확실히 이해하고 그것을 존중하였으며 그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실질적인 초기 창업 멤버인 윌리엄 할리와 아서 데이비슨은 상대적으로 뒤에 합류한 데이비슨 형제들에게 사장과 부사장직을 양보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장점과 능력을 알고 그것을 적절히 배분하며 상호 존중하지 않았다면 서로 직책을 나누는 과정에서도 다툼이 있었을 것이고 아마도 그랬다면 이들이 앞으로 닥칠 위기들을 결코 극복할 수 없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 홍보와 마케팅의 할리데이비슨
할리데이비슨은 모터사이클 회사이지만, 단순히 모터사이클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들은 홍보와 마케팅에 대한 필요와 그 가치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회사가 처음 자리잡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던 1900년대 초반은 이제 막 자동차 산업이 부흥하던 시기였다.
자동차 산업의 대표주자였던 포드에서 T형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던 1908년 직후인 1909년. 할리데이비슨은 배기량 811cc로 최고 7마력을 냈던 자사 최초의 V트윈 엔진을 개발하면서 아메리칸 V트윈 모터사이클 시대에 합류했다. 연이은 1910년은 그 유명한 할리데이비슨의 바 앤 실드 로고를 처음으로 적용한 시기로 기록됐다.
현대에는 큰 배기음이 마치 할리데이비슨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는 경향도 있지만, 초창기 할리데이비슨은 ‘사일런트 그레이 펠로우(조용한 회색 친구)’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당연히 배기음이야 있었겠지만, 그 밖의 다른 소음이 없을 정도로 완성도 있는 엔지니어링으로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었고 상대적으로 속도를 경쟁하는 쪽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영국과 유럽에서 미국 땅으로 들어온 이름난 모터사이클들은 모두 주말의 레이스를 통해서 성능을 과시하고 그 명성으로 모터사이클 판매를 이뤄나가고 있었다. 할리데이비슨의 창업주들은 처음부터 이런 레이스에 집중하지 않았지만 이런 활동이 꼭 필요하다고 여기고 1914년부터 할리데이비슨의 팩토리 레이스 팀을 꾸리면서 레이스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본사의 지원을 받은 할리데이비슨의 팀은 꽤나 성공적이었으며, 승리가 계속되면서 기존의 강자들을 깨부수고 다니는 팀이란 의미로 ‘레킹 크루’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한 1916년부터 시작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모터사이클 잡지 중 하나로 꼽히는 할리데이비슨 매거진 ‘더 엔수지아스트’가 발행됐다.
여기에는 창업주 아서 데이비슨이 스스로 차별화된 매장의 디스플레이나 서비스에 대해 기고하는 등 자신이 관리하고 있는 딜러 영업 분야에서 이 잡지를 활용하기도 했다. 사실 어떤 메시지를 특정 대상에게 전달하는 방법은 무척 다양하다. 특히 최근처럼 다양한 미디어가 빠르게 소비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 그렇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메시지다.
정확한 목적을 갖고 대상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쉽게 휘발되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런 활동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타임 투 라이드’ 역시 마찬가지의 의미다.
■ 굴곡의 역사
할리데이비슨이 레이스를 통해서 한 단계 더 발전하면서 딜러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더 많은 이들에게 모터사이클링을 전파하고 있던 시기였던 1914년. 유럽에서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그리고 1917년에 미국이 참전을 선언하면서 할리데이비슨은 자사의 전체 모터사이클 생산량(약 2만 대)의 약 절반 가량을 미군을 위해 납품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민간을 위한 모터사이클 공급이 줄어 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안정적인 매출을 등에 업고 생산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으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썩 나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1918년 1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현재의 코로나19 상황처럼 심각했다는 스페인 독감이 유행했다.
미국 캔자스 주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스페인 독감의 여파는 우리가 지난 몇 년 전에 경험했던 것 이상이었다. 소비 심리가 위축되는 것이 당연한 일. 이 시기 할리데이비슨은 전세계 최대 규모 수준의 제조사로써 67개 국가에 약 2000개에 달하는 딜러를 갖추고 있었는데, 판매량 감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이들은 보다 적극적인 홍보와 마케팅 활동에 나선다.
레저 스포츠 활동의 도구로써의 매력을 어필하는것은 물론이고 사용자를 확대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여성 라이더를 전면에 내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판매량 감소는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약 2만 대 수준에서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으며, 이들은 1923년에 이르러 팩토리 레이싱 팀을 해체하고 의류 및 액세서리의 공식 카탈로그를 제작하는 등 수익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할리데이비슨은 뿐만 아니라 1918년 이후 단종되었던 단기통 모델을 재생산하기도 했다. 다양한 수요층을 만족시키기 위한 노력인 것은 물론 V트윈 엔진에만 의존하지 않고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런 예는 최근의 모터사이클 산업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최근에는 개발과 생산 비용이 급증하면서 많은 브랜드들이 각각 자사의 순정 액세서리를 크게 확대해 개발 비용 때문에 줄어든 수익을 보전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모터사이클의 매력을 어필하고 수요층을 더 확장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며 그들이 소비할 수 있는 의류와 액세서리들을 공식적으로 판매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할리데이비슨의 팬 층이 생겼다는 것이며 실제로 이 시기에 할리데이비슨 오너스 클럽들이 처음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기록에 남아있는 최초의 할리데이비슨 오너스 클럽(1924년 출범, 1978년까지 유지)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들어졌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클럽(1927년부터 현재까지)은 유럽 국가인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만들어졌다.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들은 1928년에 최초의 트윈 캠 엔진을 개발하는 한편, 이듬해인 1929년부터 플랫 헤드 V트윈 엔진을 사용한 D 모델을 출시하는 등의 기술 개발도 계속 이어갔다. 자사의 모터사이클을 처음으로 수출했던 일본에서 할리데이비슨을 라이센스 생산할 수 있게 제공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판매량은 연간 2만1천대 수준에 머물렀다. 그리고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세계에 영향을 미친 대공황이 왔다. 1차 세계 대전 이후에 이어졌던 호경기가 끝나고 시작된 대공황은 그야말로 미국 경제를 완전히 파탄냈다. 할리데이비슨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상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삼륜형 화물차량인 서비 카(Servi-Car) 등을 출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할리데이비슨의 판매고는 1933년 기준으로 연간 3703대로 그야말로 급감하면서 그들의 역사 속에서 최대 위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사실상 이 위기를 극복할 뾰족한 수는 없어보였다.
2부에 계속...
■ 할리데이비슨 120년 역사
1901, 21세의 청년 윌리엄 실베스터 할리(William Sylvester Harley 1880-1943)가 그의 친구인 아서 데이비슨 시니어(Arthur Davidson Senior 1881-1950)와 함께 자전거에 얹을 엔진의 설계도를 완성
1903, 할리데이비슨 창업, 윌리엄 할리와 아서 데이비슨이 그들의 첫 모터사이클 시리얼 넘버 원을 만듦
1906, 현재는 주노 대로(Juneau Avenue)로 명칭이 변경된, 체스트넛 스트리트(Chestnut Street) 부지에 약 683m² 면적의 새 공장을 건설
1907, 아서와 월터 데이비슨의 형제인 윌리엄 A. 데이비슨이 밀워키 도로 및 철도 공사를 그만두고 할리데이비슨 모터 컴퍼니에 합류
1908, 포드 T형 자동차 생산 시작
1909, 할리데이비슨 최초의 V트윈 개발, 811cc로 최고 7마력
1910, 바 앤 실드 로고를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 트레이드 마크로 등록한 것은 1911년-경술국치, 한일병합조약으로 일제강점기가 시작
1911, F 헤드 V형 2기통 엔진을 할리데이비슨에 적용하기 시작함, F 헤드 엔진은 1929년까지 사용됨
1912, 할리데이비슨을 처음으로 일본 제국으로 수출함, 주노 대로에 6층 총 27,871m² 규모의 공장 건설
1913, 미국 최초의 대륙 횡단 고속도로인 링컨 하이웨이 완공
1914, 할리데이비슨이 정식으로 레이스에 참여하기 시작함. 수많은 승리로 레킹 크루(Wrecking Crew)로 불림, 할리데이비슨 최초의 사이드카, 제 1차 세계 대전 발발
1915, 할리데이비슨 최초의 3단 변속기 적용
1916,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모터사이클 잡지인 ‘더 엔수지아스트(The Enthusiast: A Magazine for Motorcyclists)’가 발행됨
1917, 미국의 제 1차 세계 대전 참전
1918, 생산량의 절반(약 2만 대) 정도가 미군을 위해 공급됨, 제 1차 세계 대전 종전, 스페인 독감 유행
1919, 새로 배치형 수평 대향 엔진을 탑재한 19W 스포츠 트윈 출시
1920, 모터사이클 판매량 감소로 모터사이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한 광고 전개, 세계 최대의 모터사이클 제조사로 67개 국가에 2,000여개의 딜러를 갖추게 됨
1921, 모터사이클 판매량 1만대 수준으로 감소
1922, JD 및 FD 모델 출시, 여성 라이더를 확대하고자 하는 광고 실시
1923, 팩토리 레이싱 팀 해체, 의류 및 액세서리 공식 카탈로그를 제작
1924, 가장 오래된 할리데이비슨 오너스 클럽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범(1978년까지 유지)
1925, 물방울 모양의 연료 탱크가 처음 적용됨
1926, 1918년 이후 단종되었던 단기통 모델의 재생산
1927,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할리데이비슨 오너스 클럽인 할리데이비슨 클럽 프라하 설립, 찰스 린드버그가 최초로 단독 대서양 횡단 비행 성공, 스탈린의 러시아 집권
1928, 최초의 트윈 캠 엔진이 JD 모델에 적용됨
1929, 이후 1973년까지 사용되는 플랫 헤드 V트윈 엔진을 적용한 D 모델이 출시됨, 연간 21,000 대 수준으로 판매량이 감소, 일본에서 라이센스 생산이 시작됨, 10년 간 이어지는 미국의 1차 대공황이 시작됨
1932, 두 개의 리어 휠을 사용하여 화물 운송을 위한 적재 공간을 갖춘 서비 카(Servi-Car)를 출시함
1933, 연간 4,000대 수준으로 판매량 급감, 아르데코 스타일의 독수리 그래픽이 처음으로 적용되며 할리데이비슨 그래픽 디자인의 시초가 됨, 아돌프 히틀러 독일 총리로 선출
<본 기사는 할리데이비슨코리아 매거진 ‘It's Time to Ride’ 2023년 봄호에서 소개된 글입니다.>
나경남 기자(월간 더모토)nanana198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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