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이 우회전하라고 해서 했을 뿐인데 벌점이 부과됐습니다.” 최근 이와 같은 민원이 반복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운전자는 억울함을 호소하고, 행정처분은 법에 따라 이뤄진다. 표면적으로 보면 단순한 해프닝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기술, 법, 제도, 그리고 정보의 단절이라는 복합적 문제가 얽혀 있다.
가장 먼저 짚어야 할 건 기술의 한계다. 내비게이션은 도로 안내 기능에 충실할 뿐, 교차로마다 다른 보행자 신호 상태, 차선 구성, 차량 속도, 주변 보행자 유무까지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판단할 수는 없다.
기술은 ‘길을 알려주는 도구’일 뿐, ‘판단을 대신하는 판단자’가 아니다. 우회전은 단순히 방향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멈춰야 할지, 보행자가 있는지를 따져야 하는 ‘상황 판단’이다. 이 판단은 결국 운전자의 몫이다.
BMW, TMAP 기반 한국형 내비게이션 탑재
그런데 문제는 많은 운전자들이 기술을 신뢰하며 ‘내비 말만 따르면 된다.’라고 믿는 데서 출발한다. 여기서 ‘법을 몰랐다’라는 억울함이 등장하지만, 그 뒤에는 국가와 기업이 제공하지 못한 명확한 정보가 있다.
즉, 일반 운전자에게 필요한 정보가 ‘명확히 전달되지 않은 채’ 법적 책임만 요구되는 구조가 된 것이다. 운전자 잘못만이 아닌, 정보 시스템 부재의 결과다. 실제로 우회전 일시 정지 의무는 법에 명시돼 있지만, 이를 실시간으로 안내해주는 내비게이션은 없다. 왜일까? 법적 책임 때문이다.
“지금 일시 정지하세요”라고 명령형으로 안내했다가 사고가 나면, 내비게이션 제작사가 책임을 질 수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은 “보행자 주의” 같은 모호한 표현으로 책임을 회피한다. 전국 수십만 개 교차로의 신호등, 차선, 정지선 정보를 일일이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토요타, RAV4 플러그인하이브리드(기본형 내비게이션)
도로 구조는 수시로 바뀌고, 지역별 특성이 다르며, 행정기관 간 정보 연계도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지도는 자주 업데이트되지만, 현실 도로와의 간극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사이 단속 기술은 정교해지고 있다. AI 기반 영상 판독 시스템은 차량이 정지선을 넘었는지, 바퀴가 완전히 멈췄는지까지 감지해 자동으로 과태료를 부과한다. 운전자는 “내비를 따랐을 뿐”이라지만, 시스템은 “법을 어겼다”고 판단한다. 이 간극이야말로 정보 불균형이 만들어낸 소비자 혼란의 단면이다.
팅크웨어 AR 내비게이션 솔루션이 적용된 체리자동차 아리조8
이제는 내비게이션에 대한 맹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술은 판단을 대신해주지 않는다. 최종 책임은 운전자에게 있다. 따라서 판단력과 법규 인식이 안전운전의 핵심이 돼야 한다. 법을 몰랐다고 해서 책임이 면제되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건 벌점 부과가 아니라, 법과 기술 사이의 정보 단절을 메우는 ‘소통 시스템’이다. 운전자에게 법을 지키라고 말하기 전에, 그 법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를 먼저 알려야 한다.